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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뿐인 지구에서 비닐과 함께 살아가는 법

- H22 장우희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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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뿐인 지구에서 비닐과 함께 살아가는 법

비닐로 만드는 튼튼한 소품, H22

일상에서 얼마나 많은 비닐봉투를 사용하고 있나요? 그린피스에 따르면 ‘한국인 한 명이 1년간 쓰는 비닐봉투는 약 9.2kg’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비닐은 재활용률이 낮을 뿐만 아니라 땅속에 매립됐을 때 잘 썩지도 않고, 소각되더라도 유해물질을 발생시키죠. 만약 비닐을 쓰레기가 아닌, 자원의 관점에서 보면 어떨까요? 희(H22)의 장우희 대표는 지구에서 비닐과 함께 살기 위한 새로운 해결책을 제안합니다.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일상의 비닐봉지를 사용해 작업하고 있는 희(H22)의 장우희입니다.


‘브랜드 ‘희(H22)’에 대해 더 자세히 알려 주세요.

많은 분이 이름 ‘H22’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혼란스러워하시기도 하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 많이들 물어보세요. 사실 특별한 의미는 없고, 제 이름 끝 글자 ‘희’와 처음 창업을 결심한 나이인 22살을 결합해 지었습니다. 희는 일상에서 쉽게 쓰이고 버려지는 비닐을 열과 압력으로 가공, 새로운 소재로 만들어 가방과 같은 패션 액세서리 제품으로 제작해 판매하고 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와 협업을 진행해 열 압착 비닐 소재의 활용 가능성을 확장시키는 다양한 시도도 하고 있어요.


22살, 이르다면 조금 이른 나이에 창업을 결심했다고 하셨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대학 커리큘럼 중 나만의 가상 브랜드를 설정해서 브랜드의 로고도 만들고, 아이덴티티도 설정하고, 어떤 제품을 판매할 건지 설정하는 수업이 있었어요. 그 수업을 너무 재밌게 들었어요. 이후 실제로 내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졸업하고 이대로 취업할지, 창업할지 고민하다가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 대학원을 갔는데, 그때 내 브랜드를 만들어야겠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비닐을 소재로 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사실 업사이클링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어요. 비닐만의 소재적 특징에 매력을 느껴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섬유 공예와 디자인 석사 과정을 공부하던 당시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새로운 작업을 고심했는데요. 그때 해외여행을 다니며 모았던 각양각색의 비닐들의 색과 타이포, 질감이 독특한 특성을 보고 매력을 느꼈습니다. ‘이런 비닐을 사용해 새로운 소재를 만들어볼 수는 없을까’라는 생각에 다양한 실험을 진행했어요. 열을 가하면 수축, 변형되는 비닐의 소재적 특징을 활용한 열 압착 기법을 고안해 작업을 이어가게 됐습니다.


해외를 여행하며 비닐봉투를 모았다고 하셨는데, 나라마다 비닐봉투의 차이점이 있나요?

나라마다 비닐의 소재와 디자인이 정말 다양해요. 일본은 색깔이 정말 다양하고 얇고 바스락거리는 소재가 많아요. 반면에 미국은 엄청 질긴 봉투가 많고, 유럽은 봉투의 패턴 디자인이 정말 다양하더라고요.

제품 제작을 위한 비닐은 어떻게 수급하고 있나요?

초반에는 제가 모으는 비닐로 충분했어요. 지금은 지인들에게도 얻어서 사용하는데, 생각보다 금방 모으는 거예요. 개개인이 비닐을 너무 많이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또, 우리나라 비닐봉지의 컬러가 제한적이잖아요. 비슷한 컬러의 비닐이 들어오는데, 모아 놓으면 재밌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요.


제품을 구매하는 분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한번 구매하는 분들이 계속 재구매를 해주세요. 제품의 가치를 알아봐 주시는 것 같아서 뿌듯합니다. 비닐이라는 소재 자체가 보편적인 소재는 아니잖아요. 그런데 막상 써보면 되게 좋은 게, 엄청 가볍고 뭐가 묻어도 방수가 되는 소재여서 물로 씻어서 말려서 쓰면 되니까 사용하기 편하고 좋다고 해주시더라고요.

비닐과 가구의 만남으로 ’조명 가구’라는 결과물이 탄생했어요. 첫 공동 작업은 어땠나요?

같은 레지던시에서 함께 작업하던 고정호 작가와의 첫 협업이었어요. 고 작가는 나무를 주로 사용하면서 전통적인 건축구조에 영감을 받아 가구를 제작하고 있었고, 저는 비닐이라는 매우 현대적인 소재로 작업을 하는 사람이다 보니 ‘상반된 우리가 같이 작업을 하면 굉장히 재미있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둘 다 변화와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성격이라 재미있는 시도를 많이 했고, 좋은 결과물이 나올 수 있었어요.

프레임 부분은 이음과 짜임이라는 한국의 전통 건축방식에 영감을 받아 철제 파이프를 통으로 잘라 만들었고, 빛이 투과되는 부분은 한국의 전통 조각보를 모티브로, 투명한 소재의 비닐들을 하나하나 이어 제작했어요. 현대적인 디자인이지만 곳곳에 전통의 요소를 녹여낸, 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 작업이죠. 리빙 분야와의 첫 협업이라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비닐로 작업하기 전과 후, 비닐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달라졌을 것 같아요. 어떤가요?

비닐을 사용하면서 비닐 소재에 관심을 가지다 보니, 비닐이 가지고 있는 환경 이슈가 너무 잘 보이는 거예요. 쓰레기 섬이라든지, 비닐로 인해 죽어가는 동식물이라든지… 내가 단순히 조형적으로 사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환경적인 요소를 고려해 어떻게 하면 재활용해서 쓸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됐어요. 비닐을 단순히 소재로 바라볼 뿐만 아니라 물건을 만드는 사람으로서의 책임감까지 생각하게 해준 존재가 된 거죠.

주로 아이디어는 어떻게 얻는 편인가요?

진부한 답변이겠지만 일상 속에서 아이디어를 얻는 것 같아요. 전혀 다른 분야의 작품이나 전시, 혹은 길거리의 사물들을 보고 ‘저것을 비닐로 재현해 보면 어떨까? 비닐과 함께 사용해 보면 어떤 느낌이 날까?’라는 생각을 자주 해요. 실제로 조명 가구 같은 경우에는 박물관에서 조명 아래 걸려있는 조각보를 보고 ‘비닐로 조각보를 만들면 어떨까? 투명 비닐을 조명으로 만들어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아이디어의 시작이었습니다.


비닐 이외에 사용해보고 싶은 소재가 있나요?

아크릴이나 레진, 재활용 플라스틱 같은 소재에 관심이 많아요. 하지만 아직 비닐로 해보지 못한 작업 아이디어들이 많이 남아있고, 아직도 비닐은 제게 너무 흥미로운 소재라 한동안 계속 비닐로 작업을 이어나갈 것 같아요.

업사이클링 클래스도 진행한다고 들었어요. 클래스를 열게 된 계기가 있나요?

2019년에 있었던 공예 레지던시에서 서울 시민들을 대상으로 클래스를 진행할 기회가 있었어요. 처음에는 내가 하는 작업을 사람들이 재미를 느낄지에 대한 걱정이 많았는데, 수업을 진행해 보니 쓰레기라고만 생각했던 비닐로 오래 사용할 수 있는 튼튼한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에 신기해하고 즐거워하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그때부터 꾸준히 클래스를 진행하고 있어요. 요즘은 집에서 보관하고 계셨던 비닐봉지를 가져오셔서 자신만의 제품을 만드시는 분들이 많은데, 그러다 보니 어느 하나 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아요. 이런 게 업사이클링 클래스의 매력 아닐까요? 저 또한 수업을 통해 새로운 작업의 영감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클래스에서 얻은 작업의 영감이 새로운 제품으로 탄생하기도 하나요?

제품을 만들어 보려고 구상 중이에요. 저는 한 소재로 계속 똑같은 작업을 하게 되어서 시야가 많이 좁아진 것 같은데, 클래스를 들으러 오는 분들은 엄청 다양한 시도를 해요. 비닐을 가위로 자르는 게 아니라 손으로 찢어서 사용하고, 비닐 두 개를 겹쳐서 사용하기도 하시더라고요. 클래스를 진행하면서 괜찮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사용해도 되냐고 여쭤봐요. 저작권 문제도 있으니 사전에 동의를 구하고 있어요. (웃음)

제품뿐만 아니라 작품도 만들고 계시잖아요. 제작하는 작품들은 주로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나요?

제품이든 작품이든 공통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비닐을 소재로 사용하면서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이 소재가 일회용으로 쓰고 버려지는 쓰레기가 아니라, 생각보다 장점이 많은 소재라는 거예요. 제 제품이나 작품을 보면서 비닐의 가치를 재발견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프랑스 파리에서도 전시를 진행했다고 들었어요.

제가 단독으로 한 전시는 아니고요. DDP 공모전에서 제 작품이 수상한 적 있는데, 그 작품으로 프랑스 파리의 메종 오브제 전시에 참여하게 됐어요. 제 작품이 궁금하신 분들에게 소개도 해드리고, 함께 전시되어 있는 작품을 보면서 저에게도 많은 공부가 된 경험이었어요.

문화역 서울에서 진행하는 기획전시에 H22의 작품이 전시된 것 축하드려요. 어떤 주제의 전시이며, 어떤 제품을 전시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감사합니다. <익숙한 미래: 공공디자인이 추구하는 가치> 전시장에서 제 작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아요. 공공디자인의 한 사례 정도이고, 텀블벅에서 진행했었던 위메프와 함께 한 ‘WE MAKE H22’ 프로젝트의 제품들을 전시하고 있어요.


위메프와 진행한 ‘WE MAKE H22’ 프로젝트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 주세요!

위메프에서 먼저 연락을 주셨어요. 택배 비닐봉지의 서체가 바뀌면서 몇만 장의 비닐을 하루아침에 사용하지 못하게 된 거예요. 회사 로고가 찍혀있어서 버릴 수도 없기에 비닐을 통해 제품을 만들어줄 사람을 찾다가 인스타그램에서 비닐로 작업을 하는 제 사진을 보고 찾아오셨어요. 마침 그 비닐이 제가 사용하던 비닐과 똑같고 튼튼한 소재여서 같이 협업을 하게 됐어요.

요즘 관심사는 무엇인가요?

독서요. 올해 초 제가 입주해있는 서울여성공예센터에 독서모임을 직접 만들었어요. 함께 2주에 1권씩 책을 골라 읽고 온라인으로 책에 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보내는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모임원들에게 조리 있게 전달하고 싶어서 독후감을 쓰고 책을 더 꼼꼼하게 읽게 되더라고요. 나와 다른 시선의 모임원들의 말에 공감하기도 하고,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하죠. 요즘 제일 기다려지는 시간입니다.


서울여성공예센터에는 어떻게 입주하게 되셨나요?

원래 이곳이 북부지방 검찰청과 지방법원 자리였는데, 검찰청과 법원이 다른 곳으로 이전하면서 새로 개관했어요. 이런 공예센터가 집 앞에 생기니 너무 좋았어요. 매년 여성 공예가들을 대상으로 서울 여성 공예 창업 대전을 진행하는데, 해당 대회에서 금상을 받고 그 가산점으로 입주를 하게 됐어요. 때마침 제가 졸업하고 작업 공간이 필요하던 시기였거든요. 운이 좋게도 타이밍이 딱 맞았어요.

쉴 때는 주로 어떻게 시간을 보내시나요?

코로나로 인해서 외부 활동이 어려워지고 사람을 만나는 것이 위험한 일이 되어버린 요즘이지만, 저는 외향적인 성격이라 쉴 때 좋은 곳에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맛있는 것을 먹고 대화하는 것을 좋아해요. 영감을 주는 재미있는 전시를 보는 것도 좋아하고, 서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커피가 맛있는 카페와 새로운 맛집을 발굴하는 것이 취미입니다. 어서 코로나 상황이 좋아져서 사랑하는 여행도 마음껏 다닐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카페와 맛집을 발굴하는 것이 취미라고 하셨는데, 추천하고 싶은 곳이 있나요?

최근에 갔던 카페 중에 ‘커피앤시가렛’을 추천해요. 저는 카페가 예쁜 것도 중요하지만 앉았을 때 편안하고, 쾌적하고 넓은 공간을 좋아하거든요. 무엇보다 커피가 정말 맛있어요. 고층이라서 뷰도 너무 좋고요. 그리고 맛집으로는 합정에 있는 평양 음식점 ‘동무밥상’을 추천해요. 북한에서 호텔주방장을 했던 분이 운영하시는데, 한식대첩에도 나오셨어요. 평양냉면도 맛의 깊이가 있고, 특히 만두가 정말 맛있어요. 그리고 진달래라는 북한 맥주도 팔아요. 너무 맛있더라고요.


앞으로의 활동이 궁금해요.

앞으로도 비닐을 사용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통해 새로운 도전을 할 예정이에요. 비닐은 소재적 장점과 잠재 가능성이 정말 많은 소재에요. 가볍지만 잘 찢어지지 않고, 다양한 색과 질감을 가지고 있으면서 열을 가해서 다양하게 변화시킬 수도 있고, 물에도 젖지 않죠. 버려지는 비닐의 새활용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희가 보여 드릴 비닐의 다양한 도전과 변신을 기대해주세요!

건강한 삶을 위한 나만의 루틴

올해 들어서 매일 꾸준히 웨이트를 하고 있어요. 작업하면서 몸이 많이 망가졌다는 것을 느끼고 운동을 시작했는데요. 특히 웨이트는 변화하는 몸을 보면서 느끼는 즐거움도 있지만 오롯이 내 몸의 자세, 호흡, 움직임에 집중하는 그 시간이 참 좋고 소중해요.


추천하고 싶은 오래된 물건

지금 사용하고 있는 다이어리. 어릴 적부터 다이어리에 온갖 메모와 일정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기록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어느 순간 유행에 따라 쓰이고 버려지는 다이어리들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지금 사용하고 있는 다이어리는 청바지 택에 사용되는 친환경 방수 소재로 제작되었다고 해요. 그래서인지 정말 튼튼하고, 가방 안에서 텀블러 물이 새서 젖어버린 적이 많은데 햇볕에 잘 말려놓으면 또 멀쩡해져요. 속지만 바꿔가면서 수년째 사용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힘이 되는 것

6년간 건강히 옆에서 함께 해준 사랑하는 반려묘 호야와 힘이 되어주는 고마운 가족과 친구들. 혼자 일을 하면서 늘 불안하고, 작은 일에도 흔들릴 때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든든하게 뒤에서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있어 포기하지 않고 지속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H22 (희)(@official_h22) • Instagram